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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원모래알 2009. 10. 17. 10:44

출처 블로그>신학의 세계는 넓습니다. | 산내음

원문 http://blog.naver.com/2002talmid/40016374252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의 만남에서 보여준 반응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폐쇄적인 배타주의, 2) 개방적인 포괄주의, 3) 종교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세 가지 중 배타주의와 포괄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종교 다원주의는 앞의 두 가지와는 분명한 성격의 차이를 보이므로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칼케톤회의 이래 계속 고수되어 온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통적 배타성을 신중히 검토할 수밖에 없는 강한 압력을 받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타종교에 대해 개방성을 취하고 있고, 개신교의 경우 뉴델리회의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타신앙과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Dialogue with Men of Other Faiths and Ideologies, 1971)를 공식 승인했고, 1975년  나이로비에서 모인 협의회에서는 “하나의 공동체 모색: 다양한 신앙, 문화, 이념을 지닌 사람들과의 공동연구”라는 성명서를 냈으며,(김경재, “종교 다원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主性”,『신학연구』27집, 27.), 1970년대 내내 타종교와의 대화의 중요성을 고조시켜 왔다.
   근대 초기에 배타적 신학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도전을 받았다. 칸트는 이성을 통하여, 슐라이어마허는 절대 의존의 감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인간 보편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종교 상대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트뢸취는 끊임없는 발전 과정이라는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대주의적인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Harold Coward, Pluralism: Challenge to World Religions(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5, p. 45) 그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사를 완전을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적 운동으로 이해했다. 그에 의하면, 각각의 종교는 신적인 원천으로부터 신적인 목표로 가기 위한 인간 정신의 투쟁이 각기 다른 문화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Ibid., p. 25) 이러한 트뢸취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주장을 한 사람이 칼 바르트이다.


(1) 폐쇄적인 배타주의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확대되어 가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Ibid., p. 45.) 바르트의 배타성은 그가 사용한, 기독교와 타종교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지구를 비추는 태양의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
  “태양과 같이 그리스도의 빛은 지구의 한 쪽에는 비추나 다른 쪽은 비추지 못하고, 지구의 한 부분은 밝히나 다른 부분은 흑암 중에 있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빛이 타종교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빛이 “거룩한 선택의 행위”에 따라 여기는 비치고 저기에는 비치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기독교는 태양빛 아래 서 있고 딴 종교들은 그림자 속에 서 있다는 것이다.(Ibid., p. 53.)


(2) 개방적인 포괄주의

  이 유형은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 독특성, 규범성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칼 라너이다. 라너의 신학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Ibid., p. 53.)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론에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와 구원을 위해 교회에 소속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라너는 전 인류를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비그리스도인들도 선험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이들에게 특정한 그리스도교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너는 중세의 ‘자연과 은총’이라는 도식을 끌어들인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로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자기 전달은 신이 자신을 알릴 수 있고 신의 자기전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피조물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을 그의 계시 속에서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은 무한자요 불가해자요 은밀자이므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하느님의 가없는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불가해한 비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 이르게 되는 그러한 존재이다.(K. Rahner, Art. Transzendental Theologie, Sacramentum Mundi, Theologisches Lexikon Für die Praxis, Bd. IV, Freiburg/Basel/Wien 1969, pp. 140-142, in:J. Moltmann, Was ist Heute Theologie?, Freiburg 1988, p. 78)
   라너는 이 측면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그리고 ‘익명적’인 것과 ‘현시적’인 것으로 상호 관련시킴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초월 경험 속에서 언제나 그리고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기 초월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 진정으로 완성되고 실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말씀의 계시는…우리가 언제나 은총에 의해 이룩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의 현시(顯示)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들을 향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창조의 목표’이며 창조를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라너에게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현시적 인간이 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존재에 이르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실현한 인간은 그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인’으로 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계시를 받아들인 셈인데, 이는 계시가 그 사람 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와 같은 긍정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가까이 와 있는 신비의 은총을 위임받는다. 그리고 이 신비는 우리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라너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천적인 연결성,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밝히기 위해 초월신학을 전개한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주신다. 하느님을 받아 모신 인간은 신적인 본성으로 성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 자녀 됨’은 본성상 반드시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자 한다. 인간의 초월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역사적으로 중개된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의 육화’이다. 라너에게 ‘육화’란 말씀의 외적 표현이며,(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4, pp. 113-117 참조. in: 이찬수, "칼 라너의 종교신학",『사목』1994. 3월 182호, 99쪽)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주시는 수단이다. 이런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개들 가운데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본다.(Ibid., p. 117. in: 이찬수, "칼 라너의 종교신학", 『사목』1994. 3월 182호, 99쪽)
   라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보편성 주장을 정립한다.”(J. Moltmann, p. 79) 라너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를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성’의 동일한 평면에 세운다. 그러나 교회 소속성과 상이한 등급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을 보존하고자 한다. 그는 전체 세계사와 인류사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성바오로 출판사, 1985, 184-185쪽) 결국 라너의 입장은 타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된다는 교회 중심주의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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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너의 제자 폴 닛터(Paul F. Knitter)는 칼 라너의 포용주의의 한계성을 넘어서 종교의 다원주의에 귀착하게 되었다.  닛터는 "이웃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 결코 기독교 신앙을 희석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계시지만, '유일한' 계시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2, 264 쪽])을 강조하고 있다.  오 강남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절대적인 확신과 독단은 무지한 자의 특권이다.  우리만 진리를 알고, 우리 교회만 진리 교회라는 그 착각과 오만은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특권이다." ([2, 269 쪽]).  아직도 한국 천주교/기독교 에서는 포용주의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성경과 교리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스 큉은 그의 저서 ([3, 253-254])에서 다음과 같이 제 3 천년기에 교회가 미래를 갖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가)  교회는 과거로 등을 돌려 중세 혹은 계몽주의 시대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되고 그 대신  기독

           교 기원에 뿌리 내리고 현대의 임무에 집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나)  교회는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 등 여러 편견을 버리고 교회의 직책과 봉사활동의 모든 면에

           서 여성을 받아들이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다)  교회는 편협한 신앙 고백에 빠져 배타적 신앙고백, 관료주의의 뻔뻔함, 성만찬의 거부 등에

           굴복하지 말 것이며, 내부적으로 교회일치운동을 실천하고 모든 파문조치의 폐지, 교파간

           의  성만찬 교제, 다양한 목회 활동 인정 등을 추구하는 범 교회적으로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  교회는 더 이상 배타적 기독교 진리 주장을 내세우는 유럽 중심적 로마 제국주의 교회가 아

           니라 언제나 더 큰 진리에 존경을 나타내는 포용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타종교

           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각 국가, 지역, 지방 교회들에게 적절한 자율권을 부여해

           야 한다.

 

 

    신학자 한스 큉은 "기독교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그 분을 믿고, 전통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그 분을 믿고,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그 분을 믿는 종교"라고 하였다.  교권을 중시하는 중세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일어난 개신교가 어처구니없게도 교권대신 '성경'을 절대시 하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요즘 카톨릭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성경우상숭배(bibliolatry)가 점점 만연해지고 있음을 우려한다.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며, 결국 궁극적인 실재의 현존함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진정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다른 여러 종교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목적과 다름이 없다고 본다.